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서재

서재 과거편 #3 - Humane Interface 인간 중심 인터페이스

이 책은 ‘iCon’이나 ‘삼미’와 함께 10회 이상 읽었던 책이다.

그러나 지금도 제목만 보면 위화감이 느껴진다.

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은 내용도 고루하고 전문용어 덩어리라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책이다.

마치 1학년 때 읽었던 ‘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이야기’ 같다.

이 책이 만약 ‘제프 래스킨의 디자인 바이블’ 같은 제목이 붙어 있었다면 나는 이 책을 사지 않았거나, 샀더라도 한 번 읽은 뒤 책장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. 그 정도로 이 책은 위화감이 보통이 아니다.

그러나 이 책은 나를 바꾸었다.

내용은 ‘인터페이스의 본질’ 같은 식으로 정해져 있는 소주제 아래 그와 관련한 내용을 늘어놓는, 일반적인 전문서적다운 구성으로 쓰여 있다.

상당히 분량이 많고, 좋은 내용도 많았지만 내 눈에 들어왔던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.

1. 습관을 잘 형성해라. 사용자는 기존에 썼던 방식대로 프로그램을 사용하려 한다.

2. 아이콘에 얽매이지 말자, 아이콘 말고도 더 좋은 대안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.

3. 모드는 인간의 상식과 거리가 멀다. 인간 중심으로 만들려면 모드는 없애는 게 낫다.

이해가 처음보다는 많이 가긴 하지만, 작가의 의도대로 다 이해했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. 물론 의도를 이해하려 노력은 했지만, 내용이 꽤나 어려운 편이고, 실무를 해보지도 않았으며, 경험도 적어서 이런 ‘본격적인’ 전문서적을 파악하기엔 아직 부족하다는 느낌이다.

그래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한 장씩 넘기고 있자니 이제까지 진행해왔던 프로젝트들이 떠오르면서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. 사실 이야기는 어렵게 했어도, 결국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프로그램을 보면 당연한 얘기들인데, 불법의 요체에 대해 백거이가 물었을 때 도림선사가 했던 이야기처럼 ‘삼척동자들도 다 아는 이야기지만, 구루도 다 실천하지 못하는’ 얘기들이다. 그건 제프 래스킨이 좋은 예시라며 써놓은 캐논 캣도 마찬가지다. 그의 방법도 당연함과는 거리가 멀었고, 사용자들은 그런 그의 제품을 외면했다.

결국 2010년 현재 이 책을 보면, 디자인에 있어서 궁극적 경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게 결론.

내용만 보면 맨 앞장의 당찬 선언(‘이 책을 우리의 해방을 위해 바친다.’)과는 달리 전형적인 전문서적이다. ‘전자 시종의 억압에서 해방’되려면 이 정도는 기꺼이 참아야 하나보다. 설명만 있으면 더 좋을 텐데, GOMS 산출과 같은 수학 공식들까지 나와 나를 괴롭힌다. 이것이 1회독 때 내가 이해는커녕 산 것에 대한 후회까지 느꼈던 이유다.

하지만 계속 반복해서 읽어 10회독에 도달했을 때(이번으로 12회다), 내 안의 문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.

그 변화는 산들바람의 설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. 산들바람의 설계에서 아이콘 인터페이스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사고를 가지게 된 건 이 책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. 앞에 썼던 책인 ‘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’에서 박민규가 말했던 ‘무작정 따라 뛰지 않는 것’을 실천한 사례이기도 하다.

앞에서 이 책은 고루하다고 했다. 그러나 이해가 될 때쯤이면, 이 책은 고루하면서도 유연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.



서재 과거편 시리즈는 모두 제가 10회 이상 읽었던 책들입니다.
제가 이해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까지 읽었던 만큼 오류 없이 쓰려고 노력했습니다.
그러나 글의 내용 중 오류가 있을 경우 바로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!
여러분의 관심과 지적은 저의 힘이 됩니다.


2012. 6. 30. 추가

무작정 따라 뛰지 않아서 저의 프로그래밍 인생이 더 험난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. 공모전같은 곳에선 따라 뛰는게 중요했을텐데요. 하지만 앞의 글에서 말했듯 당시 제 목표는 뛰어난 프로그래머 같은게 아니라 라인트레이서 대회에서의 지역 격차에 대한 결말을 보고싶었던것 뿐입니다. 따라 뛰어서 좋은 상 탄다고 결말을 얻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에 인생은 더 험난해졌어도 그건 잘못이 아니라 운명이겠죠.